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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이미 AI에게 묻고 있다 — 루체른의 AI 예수와 한국 교회

스위스 루체른 성당의 'AI 예수' 실험과 바나 그룹 통계로 확인하는 현실 — 성도들은 이미 AI에게 영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알아야 분별하고 지도할 수 있습니다.

조성현 · 사역자 · AI 윤리 · 옵시디언 PKM 강사

#AI 윤리#AI와 목회#AI 이해#다음 세대

2024년 가을, 제가 사는 스위스에서 낯선 뉴스가 하나 흘러나왔습니다. 루체른의 성 베드로 성당(Peterskapelle) 고해소에 들어가면 격자창 너머로 예수님의 얼굴을 한 홀로그램이 나타나 "평화가 그대와 함께"라고 인사를 건넨다는 것입니다. 방문자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 형상이 성경을 근거로 답을 합니다. 사제가 아니라 인공지능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웃어넘기지 못했습니다. 이 실험이 한국 교회에도 곧 닥칠 질문을 앞당겨 보여 주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고해소에 앉은 인공지능 — '데우스 인 마키나' 실험

먼저 사실관계를 정확히 해 두겠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데우스 인 마키나(Deus in Machina)', 우리말로 "기계 속의 신"입니다. 루체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성 베드로 성당이 루체른 응용과학예술대학의 몰입형 현실 연구팀과 함께 2024년 8월부터 두 달간 진행한 예술 설치 프로젝트였습니다. 성당 측 신학자 마르코 슈미트가 기획에 참여했고, 챗GPT 계열의 언어 모델을 기반으로 약 100개 언어로 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어 짚어 둡니다. 이것은 정식 고해성사가 아니었습니다. NBC 뉴스 등 여러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성당 측은 "고해성사를 모방하려는 의도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 고해소라는 공간을 택한 것은 죄 사함의 예식을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종교의 자리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관찰하려는 실험이었지, AI에게 사죄권을 준 사건이 아닙니다. 이 구분을 놓치면 논의가 처음부터 엉뚱한 곳으로 갑니다.

900번의 대화, 셋 중 둘은 "영적 경험이었다"

그런데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두 달 동안 약 900명이 이 'AI 예수'와 대화했습니다. 사람들이 꺼내 놓은 주제는 가볍지 않았습니다. 참사랑, 외로움, 전쟁과 고통, 사후 세계, 하나님의 존재, 심지어 교회가 안고 있는 아픈 문제들까지. 그리고 포브스와 가디언(The Guardian)이 전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피드백을 남긴 230여 명 가운데 3분의 2가 이 대화를 "영적 경험"이었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습니다. 밖에서는 "악마의 작품"이라는 격한 비판이 쏟아졌고, 종교학자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야 할 고백의 본질을 기계가 흉내 내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우려했습니다. 저 역시 이 실험을 옹호할 마음은 없습니다. 기계가 만든 형상 앞에서 마음을 여는 일에는 신학적으로 따져 물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지점은 찬반이 아니라 저 900명입니다. 그들은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그 부스에 들어갔고,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질문들을 기계 앞에 내려놓았고, 상당수가 거기서 무언가를 경험했다고 말했습니다. 기술은 이미 영적 영역의 문턱을 넘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허락했든 하지 않았든 말입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위스 가톨릭의 특이한 실험이겠지"라고 넘기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통계가 그 마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조사기관 바나 그룹(Barna Group)이 2025년 말 미국 성인 1,500여 명과 개신교 목회자 440여 명을 조사해 2026년 초에 발표한 결과를 보면, 미국 성인 10명 중 3명이 "AI의 영적 조언이 목회자의 조언만큼 신뢰할 만하다"고 답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기독교인으로 좁히면 오히려 34퍼센트로 올라가고, Z세대는 39퍼센트, 밀레니얼 세대는 44퍼센트까지 치솟습니다. 젊을수록 AI를 목회자만큼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조사에서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기독교인 10명 중 4명은 AI가 자신의 기도와 성경 공부, 영적 성장에 실제로 도움을 주었다고 답했습니다.

앱 시장의 흐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바이블 챗(Bible Chat) 같은 신앙 챗봇 앱은 다운로드 3천만 건을 넘긴 것으로 알려졌고, 비슷한 앱들이 계속 쏟아지고 있습니다. 한국이라고 다를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 성도들의 주머니 속에는 밤 세 시에도 대답해 주는 상담자가 들어 있습니다. 심방 약속을 잡기 어려워하던 청년이, 목양실 문을 두드리기 부담스러워하던 성도가, 지금 이 순간에도 화면을 향해 묻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나요?"

저는 청소년부와 어린이부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사역자입니다. 그 자리에서 보는 다음 세대에게 AI는 이미 '신기술'이 아니라 공기입니다. 숙제도, 진로 고민도, 친구 관계의 상처도 챗봇과 먼저 이야기하고 옵니다. 그 아이들이 신앙의 질문이라고 해서 챗봇을 건너뛰고 교역자를 찾아올 것이라 기대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순진한 가정입니다. 밀레니얼 세대의 44퍼센트가 AI의 영적 조언을 목회자만큼 신뢰한다는 위의 숫자는, 지금 우리 교회학교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자랄 십 년 뒤에는 더 높아져 있을 것입니다.

준비된 목회자는 12퍼센트

여기서 제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한 숫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같은 바나 조사에서, 성도들이 기술 시대를 신앙적으로 통과하도록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한 목회자는 12퍼센트에 그쳤습니다. 반면 실천적 기독교인의 약 3분의 1은 바로 그 지도를 교회로부터 받기 원한다고 답했습니다. 성도는 묻고 싶은데 목회자는 답할 준비가 안 된, 뼈아픈 간극입니다.

더 눈여겨볼 것은 성도들의 이중적인 마음입니다. 같은 조사에서 실천적 기독교인의 83퍼센트가 "AI가 성경을 잘못 해석할까 봐 걱정된다"고 답했습니다. 쓰고 있지만 불안하고, 불안하지만 계속 씁니다. 이것이야말로 목회적 돌봄이 필요한 상태 아닙니까? 성도들은 AI를 버리라는 호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낯선 도구 앞에서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 줄 목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기회 — 도구의 시대일수록 인격이 그리워집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밀려나는 중일까요? 저는 정반대의 가능성을 봅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나와 너'의 인격적 만남과 '나와 그것'의 도구적 관계로 구분했습니다. AI는 본질상 '그것'입니다. 아무리 따뜻한 말투로 대답해도, 그것은 나를 위해 울어 본 적이 없고 나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AI가 상담과 조언과 위로까지 도구화하는 시대가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인격적 만남에 목말라하게 됩니다. 아픈 척하는 응답이 아니라 진짜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존재, 화면이 아니라 손을 잡아 주는 존재를 찾게 됩니다. 그 갈급함이 향할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저는 교회라고 믿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따라 몸으로 곁에 있어 주는 공동체는 어떤 기술로도 복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루체른의 실험이 역설적으로 증명한 것도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기계 앞에서까지 쏟아 놓은 그 질문들 — 사랑, 외로움, 고통, 하나님 — 은 원래 교회가 받아 온 질문들입니다.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들어 줄 사람이 어디 있는지가 바뀌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이 기회는 자동으로 오지 않습니다. 교회가 주는 것이 프로그램과 정보뿐이라면, 그것은 AI가 더 빠르고 친절하게 제공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름을 불러 주고, 기억해 주고, 함께 밥을 먹고, 병상 곁에 앉아 주는 몸의 현존입니다. 그러니 AI 시대의 목회 전략은 둘이 한 쌍입니다. 도구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은 과감히 도구에게 맡겨 시간을 벌고, 그렇게 번 시간을 도구가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일 — 기도와 만남 — 에 쏟아붓는 것입니다. 기술을 배우는 목적이 결국 더 인격적인 목회를 위한 것이라는 이 순서를 놓치지 않는다면, AI는 교회의 경쟁자가 아니라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압력이 될 수 있습니다.

알아야 분별하고, 분별해야 지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단순합니다. 목회자가 AI를 쓰느냐 마느냐는 이제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성도들이 이미 AI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본질입니다. 목회는 대상이 있는 일이고, 그 대상이 사는 세상을 모르면 목회가 어렵습니다. 무조건 수용도 무조건 반대도 편한 길입니다. 그 사이에서 고민하며 걷는 좁은 길이 목회자의 몫인데, 그 길은 알아야만 걸을 수 있습니다. 챗봇이 성경을 어떻게 인용하는지, 어디서 그럴듯하게 틀리는지, 어떤 위로가 진짜이고 어떤 위로가 확률 계산인지 — 직접 만져 보고 분별해 본 목회자만이 성도에게 "이건 이렇게 쓰고, 여기서부터는 조심하세요"라고 말해 줄 수 있습니다. 12퍼센트 안에 들어가는 길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배우면 됩니다.

당장 이번 주에 시작할 수 있는 것 세 가지를 제안드립니다. 첫째, 직접 물어보십시오. 챗봇을 열고 성도들이 던질 법한 질문을 그대로 던져 보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데 하나님이 계신 걸까요?" 그 답을 읽으며 어디가 그럴듯하고 어디가 비어 있는지 목회자의 눈으로 뜯어 보십시오. 이 삼십 분이 어떤 기사보다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둘째, 성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심방과 소그룹에서 "혹시 AI에게 신앙 질문 해 보신 적 있으세요?"라고 묻는 것만으로 대화의 문이 열립니다. 아마 생각보다 많은 성도가 머뭇거리며 "사실은요…"라고 시작할 것입니다. 그 머뭇거림이야말로 목양의 자리입니다. 셋째, 함께 배우는 자리를 만드십시오. 이 주제는 혼자 유튜브로 따라가기에는 변화가 빠르고, 신학적 분별까지 겸해야 해서 목회자들이 같이 공부할 때 가장 멀리 갑니다.

저는 이 고민을 나누기 위해 교회와 목회자 모임을 찾아가 AI 시대의 목회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루체른의 실험 같은 사례에서 시작해, 목회 현장에서 AI를 분별 있게 다루는 실제 훈련까지 다룹니다. 혼자 차근차근 시작하고 싶으시다면 옵시디언·AI 강의목회자를 위한 옵시디언과 AI 에이전트 소개 글부터 보셔도 좋습니다. 성도들은 이미 묻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답할 준비를 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