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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끝내 읽지 못하는 것 — 암묵지와 체화된 인지, 그리고 목회자의 자리

기도 제목 뒤의 진짜 고민, 회중의 공기, 함께 우는 일. AI가 결코 읽지 못하는 암묵적 정보를 짚고, 그래서 AI에게 무엇을 맡겨야 하는지로 나아갑니다.

조성현 · 사역자 · AI 윤리 · 옵시디언 PKM 강사

#암묵지#AI 이해#AI와 목회#심방

심방 자리에서 한 성도가 기도 제목을 내놓습니다. "직장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문장은 짧고 평범합니다. 그런데 그 방에 앉아 있던 목회자는 압니다. 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는 것, 배우자가 순간 시선을 내렸다는 것, 지난달 심방 때는 없던 무거움이 거실에 깔려 있다는 것을. 기도 제목은 '직장'이지만 진짜 고민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문장을 그대로 AI에게 입력하면 어떻게 될까요? 놀랍도록 정돈된 답이 나옵니다. 직장인을 위한 성경 본문, 위로가 되는 기도문, 관련 설교 개요까지 몇 초 만에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그 답은 방금 그 방의 공기를 전혀 모릅니다. 저는 영국에서 공부하며 AI 윤리를 연구하던 시절부터, 그리고 지금 사역 현장에서 이 도구들을 매주 쓰면서 이 간극을 계속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AI가 끝내 읽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때에만, 우리는 이 도구를 두려움도 과신도 없이 쓸 수 있습니다.

먼저, AI가 정말 잘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균형을 위해 반대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AI가 잘하는 영역에서 AI를 이기려는 것은, 자동차와 100미터 달리기를 하겠다고 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본문의 해석사, 신학적·역사적 배경, 헬라어·히브리어 분석, 주석 비교, 예화 검색, 레퍼런스 확인 — 이런 일에서 AI는 이미 한 개인이 평생 쌓을 수 있는 양을 넘어섰습니다. 3주 전에 조사한 연도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저와 달리, AI는 번역된 거의 모든 텍스트를 재료로 갖고 있습니다. 중학생이 내 설교의 어느 단어를 오해할지, 어르신이 어느 대목에서 걸려 넘어질지 미리 점검하는 일도 AI가 훨씬 빠르고 정확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자동차와 경주하는 대신 자동차에 올라타 조종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조종석에 앉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기도 제목 뒤의 진짜 고민 — 암묵적 정보

앞의 심방 장면이 보여 주는 것을 저는 암묵적 정보라고 부릅니다. 문서로 적히지 않았고, 적을 수도 없어서, 데이터가 되지 못한 정보입니다.

심방하면서 목회자가 느끼는 그 가정의 분위기. 기도 제목 뒤에 숨겨진 진짜 고민. 청년부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설교 시간에 직접 언급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감각. 최근 지역 사회에 안 좋은 소문이 돌아 성도들이 말없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 AI는 이 중 어느 것도 모릅니다. 학습할 데이터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압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께서 제사가 아니라 인애를 원하신다고 말하고(호 6:6), 미가서는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라고 말합니다(미 6:8). 그 인애는 정보 처리가 아니라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공동체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공동체의 결, 그 미묘한 기류를 읽는 눈 — 이것을 저는 목회자만 가진 '안목적 정보'라고 표현합니다. 이 안목은 검색되지 않고, 다운로드되지 않습니다.

체화된 인지 — 가르칠 수 없는 직관

이 안목에는 인지과학의 이름도 있습니다.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입니다. 수십 년간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쌓인 패턴 인식이, 데이터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직관으로 작동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말로 하면 '눈치'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눈치를 누가 가르칠 수 있습니까? 매뉴얼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눈치가 아닙니다. 좋아해 보고, 미워해 보고, 미움을 받아도 보고, 오해했다가 화해해 본 수십 년의 상호작용이 있어야만 생기는 감각입니다. 여기에 신앙인에게는 한 겹이 더 있습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 양심의 울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순간 — 이것 역시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다음 세대가 걱정되는 이유도 선명해집니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는 관계의 경험을 쌓기 전에 기술을 먼저 손에 쥡니다.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문자로 대화하고, "통화하자"는 말에 "왜요?"라고 되묻는 아이들은, 맥락을 몸으로 익힐 기회 자체가 적습니다. 수십 년의 부대낌으로 체화된 인지를 이미 갖춘 기성세대 목회자와 달리, 다음 세대는 이 감각을 기르기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삽니다. AI의 한계를 가르치고 맥락을 읽는 훈련을 시키는 일이 다음 세대 교육의 핵심 과제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AI가 틀린 답을 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목회자가 AI가 아는 것만 알게 될 때입니다. 본문 분석과 배경 지식은 화려한데 지금 이 회중의 공기를 읽는 감각이 없다면, 사역은 정확한 정보 위에서 길을 잃습니다. 도구가 아니라 감각의 상실이 진짜 위기입니다.

같은 진리, 다른 처방 — 분별은 환원되지 않는다

이 감각이 가장 날카롭게 요구되는 자리가 설교입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것도 진리이고 믿음을 강조하는 것도 진리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지쳐 있는 교회에는 은혜를 외쳐야 하고, 값싼 위로에 젖어 정죄를 잊은 회중에게는 다른 말씀이 필요합니다. AI는 두 설교 모두 완벽에 가깝게 써 줍니다. 부탁하면 각각 열 편씩이라도 써 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교회에 어느 쪽이 필요한지는 알지 못합니다. 같은 문장도 어떤 맥락에서 선포되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하는데, 그 맥락은 데이터가 아니라 회중과 함께 살아온 세월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별은 회중 곁을 지켜 온 사람에게만, 그리고 성령의 역사 안에서만 주어집니다.

목회적 판단이 효율이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도 지금은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고, 효율만 따지면 어리석어 보이는 길이 목회적으로는 옳은 길일 때가 있습니다. 어느 알고리즘도 이 결단을 대신 내려 주지 못하고, 대신 내려 주게 해서도 안 됩니다. 최종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는 한, 이 자리는 위임이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아픈 척과 진짜 눈물 사이 — '나와 너'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둘로 나눴습니다. 상대를 이용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 그리고 상대를 인격으로 마주하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AI는 본성상 모든 것을 '그것'으로 다룹니다. 효율의 논리 안에서는 사람도 처리해야 할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도구에 둘러싸여 살수록, 사람들은 자기를 '너'라고 불러 줄 누군가에 더 목말라집니다.

AI는 이제 위로의 말도 제법 합니다. 슬픈 사연을 들려주면 함께 아파하는 듯한 문장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픈 척이지 아픔이 아닙니다.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의 손을 잡고 정말로 함께 우는 일, 고난의 긴 터널을 몇 년이고 같이 걸어 주는 일은 몸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대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전하느냐"가 더 중요해진다고 봅니다. 유창한 말은 흔해졌습니다. 흔해지지 않는 것은, 시골 교회 한 권사님의 삶이 전하는 복음처럼 살아낸 인격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도구가 되어 가는 세상에서, 인격적 만남에 굶주린 사람들은 결국 그런 사람이 있는 공동체를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AI를 멀리하라"가 아닙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이 글이 AI를 경계하는 글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강의에서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그러니까 결국 안 쓰는 게 경건한 거군요"라고 정리하시는 목사님이 꼭 계십니다. 그런데 제 결론은 정반대입니다. AI를 거부하는 것이 항상 경건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이미 AI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는 한, 그 세상을 모르는 채로는 목회 자체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AI로 대체되지 않습니다. 최종 책임과 분별의 자리는 위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AI를 활용하는 목회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살아남는 사람은 AI를 거부하는 사람도, AI에 삼켜진 사람도 아니라, AI가 못 하는 일을 하면서 AI를 도구로 부리는 사람입니다.

논리를 이어 보면 이렇습니다. 함께 우는 일, 공기를 읽는 일, 이 교회에 필요한 말씀을 분별하는 일은 목회자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에는 시간과 마음의 여백이 필요합니다. 자료 조사와 분류와 정리에 밤을 새우고 나면, 정작 사람 곁에 앉아 있을 힘이 남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합니다. AI가 잘하는 반복 작업은 AI에게 맡기고, 그렇게 아낀 시간을 AI가 영원히 못 하는 일에 쓰는 것입니다. 검색과 정리는 도구에게, 눈물과 분별은 사람에게.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AI 시대 목회자의 자리이며, 기술을 절제하며 맥락적 판단을 붙든 채 쓰는 것이야말로 기술을 가장 잘 쓰는 길입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목회자야말로 이 도구를 다루기에 유리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AI에게 일을 시키는 핵심 역량은 코딩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자연어로 쉽게 설명하는 능력인데, 어려운 진리를 어떻게 하면 쉽게 전할까를 평생 고민해 온 사람이 바로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의 삶의 직관과 설교 경험 위에 도구 하나를 얹는 것뿐입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자연어로 모든 것이 되는 시대는 오히려 모두를 같은 출발선에 다시 세워 주었습니다.

그 첫걸음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내가 읽어 온 그 암묵적 정보들 — 만남과 분위기와 깨달음 — 을 기록으로 남겨 맥락을 쌓는 것입니다. 그 이유와 방법은 목회자에게 왜 옵시디언인가에서 이어서 다뤘습니다. 그리고 기록 위에 AI를 세우는 전체 그림은 목회자를 위한 옵시디언과 AI 에이전트에 담아 두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같은 자리에서 나누고 싶으시다면 강의단체 세미나에서 목사님들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