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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설교까지 쓰는 시대, 목회자는 대체될까

AI는 이미 설교문을 잘 씁니다. 그럼에도 목회자가 대체되지 않는 이유를 만인제사장 직분론과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세 가지에서 찾고, 직분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옮겨지는지 정리합니다.

조성현 · 사역자 · AI 윤리 · 옵시디언 PKM 강사

#AI와 목회#설교#AI 이해#AI 윤리

목회자들을 모신 강의에서 이런 농담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오는데요 — ' 부활절 설교, 아주 은혜 되게 하나 작성해 줘' 하고 그대로 강단에 들고 올라가신 분은 안 계시겠죠?" 웃음이 터졌지만, 그 웃음 끝에 잠깐의 침묵이 있었습니다. 그 침묵 안에 오늘의 질문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AI가 설교문까지 써내는 시대에, 목회자라는 존재는 대체되는가.

이 질문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뤄 보려 합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저는 "대체되지 않는다"는 쪽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흔히 듣는 위로 — "그래도 기계가 사람만 하겠어요" — 와는 조금 다릅니다.

인정부터 하겠습니다 — AI는 설교문을 잘 씁니다

먼저 정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AI는 위로의 설교도, 도전의 설교도 기가 막히게 써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역사적 배경을 끌어오고, 논리적 흐름이 매끄러운 원고를 몇 분 안에 완성합니다. 원어 분석과 주석 비교는 — 죄송한 말씀이지만 — 사람이 속도로 이기려 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됐습니다. 번역된 거의 모든 텍스트 자료를 학습한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남의 이야기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이 매주 설교 준비에 AI를 깊이 쓰고 있습니다 — 다만 원고의 문장은 제가 씁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을 점검받고, 다양한 관점을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이런 생각을 했던 설교자가 있었구나, 이런 고전이 있었구나" 하며 은혜를 받은 적도 많습니다. AI에게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의 실무적인 경계는 설교 준비에 AI를 쓰는 법에서 자세히 다뤘으니, 이 글에서는 그 너머의 질문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도구가 이렇게까지 잘하는데, 왜 저는 대체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대체될까"라는 질문이 전제하고 있는 것

대체 불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밑에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설교는 콘텐츠 생산이고, 목회자는 그 생산을 독점해 온 전문직이라는 전제입니다. 이 전제 위에서라면 불안은 정당합니다. 더 빠르고 더 박식한 생산자가 나타났으니까요.

그런데 이 전제 자체가 성경적인지 물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선언합니다(벧전 2:9).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맡겨져 있던 제사장의 직무가 모든 성도에게 열린 것 — 종교개혁이 되찾은 만인제사장의 원리입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도 특정 직분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가리켜 쓰인 표현이었습니다(벧전 2:16). 오해는 마십시오 — 만인제사장은 목사 직분을 없애는 교리가 아닙니다. 말씀을 맡은 직분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것입니다(엡 4:11). 이 교리가 바로잡는 것은 직분의 존재가 아니라 직분의 근거입니다. 목회자의 자리는 처음부터 '기능의 독점'이 아니라 '부르심과 섬김' 위에 서 있었습니다. 가르침의 권위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권위는 남들이 못 하는 일을 혼자 할 수 있다는 데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질문이 뒤집힙니다. AI가 설교문 작성이라는 기능을 아무리 잘 수행해도, 애초에 기능 독점 위에 서 있지 않던 직분은 그 기능과 함께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체 불안이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면, 혹시 내가 내 직분을 기능의 성으로 이해해 오지는 않았는지 — 저 자신부터 그렇게 되물어야 했습니다.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세 가지

그렇다면 설교자에게 남는 것, AI가 끝내 대신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강의에서 이것을 세 가지의 복합 작용이라고 설명합니다. 목회는 논리와 효율의 일이 아니라, 이 셋이 함께 움직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 설교자의 마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본문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그 이끄심은 알고리즘의 출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설교 준비의 처음과 끝에 기도를 두는 이유입니다.
  2. 성도들과 함께 살아오며 쌓인 맥락적 이해. 같은 본문이라도 이번 주 우리 공동체에는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왜 데이터로 존재할 수 없는지는 AI가 끝내 읽지 못하는 것에서 깊이 다뤘습니다.
  3. 지금 이 공동체에서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신 일에 대한 인식. 교회 안의 계절을 읽고 "지금은 위로의 때인가, 도전의 때인가"를 분별하는 눈은, 그 공동체를 위해 기도해 온 사람에게만 열립니다.

셋 모두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고, 따라서 계산되지 않습니다. AI가 설교문을 쓸 수는 있어도, 이 세 가지 없이 쓰인 원고는 아직 설교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원고는 설교의 재료이지, 설교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설교문이 상처가 되는 시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보겠습니다. 세 가지가 빠진 채 "문자적으로 완벽한" 설교문이 강단에 오르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저는 그것이 상처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봅니다. 성도에 대한 이해 없이 문자적 완성도만 갖춘 메시지는, 말은 옳은데 사람을 향하지 않는 말이 됩니다. 설교자는 최선을 다했다고 느끼는데 성도는 도구적으로 다뤄졌다고 느끼는 — 그 어긋남이 완벽한 문장 뒤에 숨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되물어 보면, 우리 성도들이 더 많은 말씀을 못 배워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설교 콘텐츠는 이미 넘칩니다. AI는 그 공급을 무한대로 늘려 줄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콘텐츠가 아니라, 이 사람에게 이 말씀이 지금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눈과, 그 말씀 곁에 함께 있어 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의 설교자에게는 원어를 더 많이 알고 구절을 더 많이 외우는 능력보다, 목회적 분별과 결단의 능력이 더 중요한 시대가 오고 있다고 수강생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지식의 값은 내려가고, 분별의 값은 올라갑니다.

대체가 아니라 재정의입니다

그래서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목회자는 AI에게 대체되지 않습니다. 다만 목회자라는 직분의 무게중심이 옮겨집니다. 콘텐츠 생산자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별하고 사람 곁에 서는 사람으로. 이것은 사실 새로운 자리가 아니라, 직분이 본래 서 있던 자리로의 복귀에 가깝습니다.

저는 오히려 수요가 커지는 쪽을 예상합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될수록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데이터가 아니라 인격으로 들어줄 사람을 더 간절히 찾게 됩니다 — AI가 끝내 읽지 못하는 것에서 다룬 바로 그 갈망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세대의 진로를 물어 오는 분들에게도 상담과 돌봄의 영역이 앞으로 더 귀해질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 설교자와 목회자도 같은 이유로 그렇습니다. 준비된 목회자를 성도들이 찾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시대가 가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 글이 "그러니 가만히 있어도 된다"로 읽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구는 배우되 중심은 지키는 훈련 — 저의 경우 그것은 기도와 말씀의 시간을 일순위로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한동안 기술 공부에 시간을 쏟느라 그 시간이 밀렸을 때 마음에 공허가 왔고, 순서를 되돌리자 오히려 기술을 다루는 힘도 함께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도구를 배우는 길은 목회자를 위한 옵시디언과 AI 에이전트에 정리해 두었고, 함께 배우는 자리는 강의단체 세미나에 열려 있습니다.

AI는 설교문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 무리 곁에 무릎 꿇는 일은 쓸 수 없습니다. 직분은 기능이 아니라 부르심이고, 부르심은 대체되지 않습니다.